요즘 퇴근하고 집에 오면 밥을 흐드러지게 차려놓고 넷플릭스를 튼다. 내가 정주행을 17번째 하는 드라마는 화제작 '더글로리'이다. 악마같은 있는 집 자식들의 학폭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마라맛 송혜교의 달라진 외모와 연기는 너무 좋다. 말 끝마다 '씨발' '존나'를 연발하는 전재준의 천박한 대사와 그와 아주 잘 어울리는 저음의 목소리는 진짜 매력적이다. 생전 욕 안하고 살던 내 뇌를 씨발과 존나로 도배를 했다. 드라마상에서 전재준이 임자있는 박연진과 신나게 떡을 치는 장소는 씨에스타라는 강남 편집숖이다. 모든 평품들이 옹기 종기 모여있는 매우 비싼 가게. 비싼 마을에서 비싼 물건만 들여놓고 비싼 거 좋아하는 사람들만 오는 그런 샾. 그 샾을 보면서 2009년 미국에 유학온 내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내가 편집숖 딸이었냐고? 씨발-그럼 내가 이 글을 왜 써!!!!!! (전재준 빙의 죄송합니다) 우리 엄마는 경기도 파주의 다세대 빌라 주인이었지만 시골에 꼴랑 그런 건물이 있어봐야 돈이 안된다. 2009년 29세의 나이에 (아홉수 단단히 치름) 잘 다니던 출판사 대리직을 집어치우고 갑자기 미국에 왔는데 철 없는 노처녀였던 나는 모아놓은 돈도 당연히 없었고 어찌 저찌 당분간 살 돈만 마련해서 미국에 왔다. 신세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기에 엄마에게 '엄마, 혹시 내가 울면서 돈 보내달라고 전화해도 절대 돈 보내주지마. 아는 내가 알아서 잘 살테니 엄마도 건강하게만 지내.' 라며 한국을 떠나왔다. 하지만 얇은 지갑이 불안했던 나는 회사를 퇴사하기 전 현대캐피탈에 전화를 해서 800만원이란 캐쉬서비스를 받아왔다.
미국이라는 타국에 홀로 비행기에서 뚝-떨어져 내린 것도 충분히 서러운데 그 서러운 삶을 돈 없이 지내려니 삶이 보통 고단한게 아니었다. 종로유학원에서 연결해준 비싼 학비를 내는 어학원에는 전세계에서 온 어린 학생들이 많았는데 대부분이 3개월 체류를 목적으로 여행 겸 온 학생들이었다. 그 학생들이 방과 후 Macy's 백화점을 다니고 그 백화점 안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나는 싸구려 마트로 달려가 베트남국수 컵라면을 사왔다. 1.99 달러하는 커피도 마음대로 사 마실 용기가 없어 무조건 집에 와서 쫄쫄쫄 머신으로 내리는 딱 커피맛만 나는 그런 커피를 마셨다. 1,285원에 육박하는 엄청난 달러환율은 내가 커피 한 잔 사 마실 용기를 내지 못하게 했다. 돈을 뽑는 순간 통장의 잔고는 내가 뽑은 돈의 두배로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미국을 와도 하필 환율이 고공행진하는 시기에 오다니...커피맛만 나는 향기 금방 달아나는 커피와 하얀 스티로폼 컵에 든 베트남국수에 스리라차 소스를 쭉 뿌려서 먹는게 내 식단이었다. 스리라차 소스의 시큼한 매운 맛이 큰 위안이 되었다.
그렇게 한 달을 살고 나는 운 좋게 돈 많은 유학생이 용돈 좀 벌려고 올린 월세글을 보고 그 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그 집 거실에서 600불이라는 미친 가격에 살게되었다. 거실이 한국 자취생들이 사는 원룸을 6개는 합친 그런 사이즈였기에 내가 한 구석에서 병풍을 치고 사는데 큰 문제가 없었다. 그 친구는 돈 많은 할아버지가 학비와 생활비를 전부 대주는 그런 친구여서 자가용을 끌고 한가하게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여자애 한 명이 더 합류하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엄마가 당시에 압구정에서 편집숖을 하는 친구였다. 더글로리에서는 돈 많은 집 자식들이 성격이 파탄난 캐릭터로 나오지만 실상은 돈 있는 집 애들은 성격이 무척 달달하다. 무엇을 놓고 크게 고민을 하거나 애를 쓰지 않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밝고 친절했다. 그 친구들과 셋이서 이사 기념으로 미국 와서 처음 한국 갈비집을 갔다. 나는 심장이 달싹거리는 그런 지경이었지만 그 친구들은 크게 게의치 않고 갈비를 시켰다. 이걸 돈을 얼마를 내야하나 고민하는 나와는 달리 웃으며 밥을 먹는 그 친구들을 보며 손을 부지런히 놀렸다. 미국 와서 일부러 한국인들과 말을 섞지 않고 한국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 막상 한 입 먹어보니 내가 얼마나 한국을 그리워하는지 단 번에 알게 되어 조금은 슬펐다. 슬픈 마음과는 반대로 손은 무척 바빴다. 일단 배를 채우고 '이걸 돈을 얼마를 내야하나...?' 고민하는 찰나, 계산서가 나오자 한 명이 고민없이 집어서 편하게 내더라.
그 날 돈을 낸 그 친구는 갓 20살이 된 여자애였고 명품 옷을 입고 다녔다. 항상 친절했고 밝았다. 그 친구가 다니는 학교는 AAU라는 아트스쿨로 많은 학생들이 다녔다. 학비가 분기마다 엄청난 학교라 보통 있는 집 자식들이 학력 생색을 내려고 다니는데 어느 날 친구들이 이사기념 파티를 한다며 우르르 왔다. 거실 한 구석에 병풍을 치고 낡은 노트북으로 미드를 보던 나는 그저 밝고 화사하고 여유있는 그 친구들을 보면서 현타가 크게 왔다. 식빵으로 끼니를 때우던 나와 달리 각종 치즈와 사온 음식들을 주방에 널어놓고 화사하게 웃는 그 친구들. 돈 걱정 없는 그 친구들이 부러우면서도 '나는 나대로 앞으로 살아야해' 라는 담담한 결심을 다시 하게 되었다. 매일 가파른 계단처럼 떨어지는 통장잔고와 29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는 고단한 삶을 살아내는 채찍질이 되었다. 매 달 들어가는 월세, 어학원비, 아무리 아껴도 어쩔 수 없이 들어가는 식비, 교통비 등등 나는 한가하게 신세한탄 할 시간이 없었다. 그 동안 무책임한 삶으로 만들어 온 320만원이라는 삼성카드값에 (와서 일해서 갚음) 불안한 마음으로 출국 직전 받아온 현대캐피탈 캐쉬서비스도 나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이것도 일해서 미국 온지 4년만에 갚음). 베트남국수 컵라면이면 어떠랴. 그것도 맛만 좋고 배부르더라. 나는 내 삶을 내 방식대로 살아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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