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리가 허연 의사서생님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주신 진단서를 들고는 터덜터덜집으로 걸어왔다. 학교가 가기 싫어 꾀병을 부렸으나 학교를 가지 않는 9시부터 저녁 내내 마음이 불편하고 의사 선생님 앞에서 망신을 당하고 나니 내 멘탈은 너덜너덜해졌다. 바르지 않은 일을 하는 마음은 정말 괴롭고 힘들다. 무언가를 편법으로 하려면 때로는 정공법으로 돌파하는 일보다 더 품과 시간이 많이 들기 마련이다. 손바닥만 한 종이에 휘갈긴 의사의 진단서와 명색을 맞추려는 몇 가지 약 처방전을 들고 하루를 허탈하게 보냈다. 진료비와 명목상 주신 약처방까지 다 합쳐서 전 날 번 돈이 모두 날아갔다. 그 처방전을 들고 내일 원장실에 찾아가 왜 학교를 제꼈는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거짓말을 하자니 너무 마음이 괴롭고 후회가 막심했다. 차라리 아침에 일어나기 싫어도 그냥 꾸역꾸역 일어나서 학교를 가고 말지, 이게 뭔 생고생인가 싶다가도 막상 학교를 갈 생각을 하면 그게 정말 시간낭비처럼 느껴져 나는 점점 더 학교 생활이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다음 날.
학교에 출석하고 쉬는 시간 원장실을 찾아갔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키가 큰 젊은 독일여성인 한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독일인의 모습에 정확히 매치하는 융통성 없고 아주 바른 여성이었다. 내가 문을 노크하고 잠시 기다리자 안에서 'Come in (들어오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거짓말을 할 계획인 내 얼굴은 사과처럼 달아있었고 그 열기를 내가 느낄 수 있었다. 한나는 내 얼굴을 보더니 내가 누구인지 아는 얼굴이었고 무슨 일로 왔는지도 아는 표정이었다. 그 다 안다는 표정이 내가 거짓말을 수월하게 하는 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손에 든 진단서를 만지작 거리며 더듬더듬 어제 결석을 했는데 아파서 못 왔다, 그렇게 짧게 말을 하고 진단서를 내밀었다. 진단서는 문제없는 문서였지만 나는 3번째 결석을 했기 때문에 한나의 표정은 어두웠고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을 나는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래, 어제 아파서 못 나왔군요."
"네... 진단서 떼 왔어요."
"진단서는 틀림없는 문서지요. 하지만 지영, 당신은 3번의 결석을 했습니다.
유학생에게 학교를 출석하는 일만큼 중요한 문제는 없어요.
우리는 이민국의 철저한 감시아래 운영을 하기 때문에 학생이 출석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보고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번에는 절대 이런 일이 없도록 하세요."
일단 3진 아웃을 모면했기에 한숨은 나왔지만 학교에 흥미가 없는 나를 보는 강사의 표정도 안타까워하는 듯 보였고 삼삼오오 모여서 쉬는 시간에 떠드는 같은 반 학생들의 얼굴도 보기가 싫어졌다. 학교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겉도는 게 정말 힘들었다. 어학원 생활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지루했고 어학원에서 영어를 배우며 보내는 시간보다 돈을 벌면서 손님들과 생생한 영어를 배우는 게 훨씬 가치 있는 일이란 생각이 하루하루 더해졌다. 그 학교에서 나는 좀 더 싸고 수업을 1시간 더 빨리 끝내주는 어학원으로 옮겼다. 그 어학원생의 대다수가 풀타임으로 알바를 하는 중이었고 미국에 체류한 지 3년 이상 된 친구들의 비율이 굉장히 많았다. 학생들끼리는 알바로 버는 돈이 얼마인지 공유하기도 했고 주변에 불법체류자가 된 친구들의 사정도 터놓게 되었다. 애초에 돈이 많은 집의 학생들은 일을 할 목적으로 오지 않기에 알바를 하지 않고 비슷한 처지의 부유한 친구들과 쇼핑을 다니거나 여행을 다닌다. 내가 옮긴 학교의 분위기는 '아 어쩔 수 없지. 알잖아'라는 분위기가 선명했다. 학급의 대부분 학생들이 서로 돈걱정을 하며 다니는 것을 보며 나는 좀 더 암울하게 느껴졌지만 그럴수록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돈을 버는데 집중을 하고 싶은데 이 학교라는 큰 의무가 정말 버겁게 느껴졌다. 안 나가면 체류신분이 불법으로 바뀌고 불법체류자가 될 결심을 하려면 나는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결심 또한 해야 했고 확실한 결실을 가지고 돌아가야 한다. 내가 어떤 결실을 가지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영어자격증?
미친 듯 일해서 종잣돈을 모을까?
대학진학해서 졸업장?
하지만 무슨 돈으로 진학하며 졸업장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머리가 무척이나 아프고 마음은 압축한 고철덩어리처럼 무거웠다.
그래, 결심했어. 그렇게 하는 거야. 마음 단단히 먹자.
다음 이야기는 3편에...
'유학생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샌프란에서는 부자(父子)가 울지 않는다-제발 좀 내려주세요!!! ㅜㅜ (0) | 2023.03.23 |
---|---|
학생비자의 족쇄(3)-불법체류자 하겠습니다. (0) | 2023.03.23 |
학생비자의 족쇄 (1)-학생비자의 감옥 (0) | 2023.03.23 |
강남 편집숖 딸과 나의 차이-갈비와 컵라면의 차이 (2) | 2023.03.23 |
13년 전 첫 홈스테이 집. (0) | 2022.04.01 |